“예민한 몸을 다스리는 내밀한 시간” 발레리나 ‘김주원’
“이거 건강 팔찌인데, 차고 있어도 될까요?”
반짝이는 액세서리와 하이힐 대신 알록달록한 건강 팔찌와 폭신한 운동화를 신은 채 어킵을 방문한 발레리나, 김주원.
자리에 앉은 그는 특유의 환한 미소와 함께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발레는 일단 몸이 게으르면, 작품에서 맡은 역할의 감정을 제대로 담을 수조차 없어요. 그래서 더 철저한 자기 관리가 필요하죠.”
발레를 ‘중력을 거스르는 예술’이라 했던가요. 올해로 데뷔 25주년, 인생의 반 이상을 발레와 함께 살아 온 김주원님이 발레를 택한 이유는 인생의 행복을 위해서였습니다. 모든 근육을 섬세하게 사용해야 하는 운동이기에 그만큼 몸을 예민하게 다룰 수밖에 없었다는 그녀. 인생의 반 이상을 발레와 함께 하면서 숱한 부상과 슬럼프를 이겨내고, 다시금 몸을 회복할 수 있게 만든 힘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저는 뭐든 싫증을 잘 내는 성격인데, 이상하게 발레는 배우면서 한 번도 싫증난 적이 없었어요. 신기하죠?”
발레를 배운 기간까지 합치면 경력이 무려 35년이에요. 처음 발레를 접했을 때 ‘내 운명’임을 알았나요?
원래 저는 뭐든지 빨리 싫증을 내는 성격이에요. 제가 4남매인데요. 부모님이 예술을 사랑하셔서 다 같이 피아노, 성악, 테니스 등 여러 가지를 함께 했는데, 발레도 그중 하나였어요. 저는 피아노도 재미가 없었고, 그림이나 악기도 금방 질렸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발레는 지겹지 않더라고요. 운명까지는 아니었지만 배우는 동안 한 번도 질린 적 없이 재밌게 배워서 신기하기는 해요(웃음).
발레에 대한 애정이 남다를 것 같은데, 인생에서 ‘발레’는 어떤 존재인가요?
저는 발레를 모르고 살았던 시절보다 알고 산 세월이 훨씬 더 길어요. 제가 지금 45살이니까 35년이면 대부분을 차지하는 거죠. 발레와 함께 살고, 함께 늙어 가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고 할까요. 학생 때 발레를 시작해 발레리나, 예술감독, 발레 교수까지. 나이에 따라 상황이 변하기는 하지만, 발레와 함께하는 삶을 계속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사랑’이라는 한 단어로 설명하긴 부족해요. 제 인생에 있어 발레는 그냥 저라는 존재 그 자체였어요. 사랑하는 존재를 넘어선 거죠.
발레가 미웠던 만큼, 발레를 사랑했던 발레리나. 김주원에게 발레는 애증이었으며, 김주원이라는 존재 그 자체였다. (이미지 출처 : 국립발레단 제공)
연인 사이에도 권태기라는 게 존재하기 마련이잖아요. 발레가 너무 좋지만, 어느 순간 쳐다보기 싫을 정도로 미울 때도 있었나요?
그럼요. 발레 때문에 힘들 때도 참 많았죠. 발레는 그 어떤 스포츠보다 육체적인 소모가 많은 운동인데, 그 안에서 예술적 표현까지 완벽히 해내야 했었으니까요. ‘왜 내가 이 짓을 하고 있지?’, ‘왜 나는 35년 동안 춤을 췄지만, 이 모양이지?’라는 생각도 많이 했었어요. 그래도 그건 정말 한때고, 발레 덕분에 제가 이렇게 살고 있지 않나 생각해요. 애증의 관계라고 해야 하나(웃음). 미움의 깊이는 사랑하는 마음의 깊이랑 비례한다고 하더라고요. 매번 나를 힘들게 하지만, 그만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마음도 드는 것 같아요.
발레리나로서 느끼는 발레의 숨은 매력은 무엇인가요?
발레는 인간이 도전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라인을 만드는 예술이에요. 동시에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들을 움직임으로 표현하며, 사람들에게 큰 위로와 감동을 주죠. 발레와 같은 공연 예술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만들어지는 예술이기 때문에 ‘찰나의 예술’이라 표현하기도 해요. 똑같은 작품이라도 매일 표현하는 게 다를 수 있고, 느끼는 것도 다를 수 있기에 관객들 저마다 감동을 느끼는 순간도 다양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단순히 동작의 아름다움을 넘어 위로와 감동을 주는 모두의 예술. 지금 제 나이에 발레리나로서 느낀 발레의 매력은 이런 점이 아닐까 싶어요.
발레를 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을 꼽자면요?
혹시 그런 말 아세요? 하루를 쉬면 내가 알고, 이틀을 쉬면 옆 사람이 알고, 사흘을 쉬면 관객이 안다는 말이 있어요. 중요한 게 너무 많아서 하나만 꼽을 순 없지만 일단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 담긴 춤을 추는 게 중요하죠. 한 시간 연습한 것과 공을 들여 진심이 담긴 춤을 추는 건 다른 것 같아요. 물론 그러기 위해선 완벽한 몸 관리가 기본적으로 뒷받침되어야겠죠?
최선의 노력이 담긴 춤을 추기 위해선 완벽한 몸 관리는 필수다.
발레를 하면서 나타난 몸의 긍정적인 변화는 어떤 게 있나요?
음, 제가 만 11살에 발레를 시작했으니까, 사실 발레를 하기 이전의 몸에 대해서는 생각을 많이 해본 적은 없어요. 아무래도 변화를 말하자면, 체형이나 자세가 이전보다 훨씬 더 바르게 개선되지 않았나 해요. 발레를 하기 위한 신체적인 조건을 타고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발레라는 것 자체가 몸 전체를 조각하며 라인을 만들어가는 일이니까요.
“저는 무대에 오르기 위해 운동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해요.” (이미지 출처 : (우) EMK엔터테인먼트 제공)
“오랜 재활 치료를 하면서 느낀 점이 있어요. 몸은 내가 투자를 하면 할수록 회복도 빠르고 건강해진다는 점이죠”
‘신체적 조건도 안 좋은 내가 발레는 왜 한다고 해서’. 세계적인 발레리나 김주원님도 부상을 당했을 때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하루도 쉬지 않았던 스트레칭, 근육을 이완해주는 반신욕, 탄탄한 코어를 다지기 위한 2~3시간의 운동. 무대에 서기 위해 했던 위와 같은 노력들이 부상으로 인해 무너지는 순간, 김주원님의 슬럼프가 시작되었습니다. 부상 이후 몸을 회복하기까지 겪은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 볼 시간입니다.
공연 도중에 허벅지 근육이 찢어졌던 적도, 발이 퉁퉁 부어 양쪽 토슈즈 사이즈가 달랐던 적도 있었지만, 관객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통증을 참으며 공연을 끝냈던 시절이 있었다. (이미지 출처 : EMK엔터테인먼트 제공)
아무래도 근육을 많이 사용하다 보니 부상을 피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공연을 하던 중 부상을 당한 경험이 있나요?
많았어요. 한 번은 무대에서 허벅지가 찢어진 거예요. 다리에 감각이 없고 묵직하게 마비가 오는 것 같은데도 무대를 끝까지 했던 게 생각나요. 족적근막염이 아주 심했을 때는 발이 오뚝이 발처럼 퉁퉁 부어서 양쪽 토슈즈 사이즈가 달랐어요. 그런데도 마취 주사를 맞으면서 호두까기 인형 공연을 마쳤었어요. 그때는 어떻게 해서든 공연을 끝내는 게 관객들과의 약속이라고 생각했어요. 미쳤었죠. 원래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웃음).
몸을 다치고 나면 회복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잖아요. 많이 힘들었을 것 같은데, 그 시간을 어떻게 견뎠나요?
가끔 저한테 슬럼프가 언제냐고 묻는 분들이 있는데, 부상당할 때예요. 부상을 당하면 아무것도 못하게 되죠. 저희는 그게 일이잖아요. 부상 때문에 춤을 출 수 없고 연습실에 갈 수 없는 상황이 발생되면 저는 그때부터 별의별 생각을 하기 시작해요. ‘발레를 왜 시작해서’라는 생각부터 스스로에 대한 자책과 원망까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죠. 그렇지만 저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 보니 부상을 당하면, 내가 가장 우선으로 해야 할 일은 열심히 치료를 받는 것이라 생각했어요.
어느 날 허리디스크가 심하게 터져서 한 달 정도 병원에 누워서 지냈던 적이 있었어요. 마비가 온 것처럼 화장실도 업혀 가고 그랬죠. 그러던 시기에 좌절만 하고 있으면 안 되겠더라고요. 숨쉬기 운동부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코어 운동을 천천히 강화했죠. 햄스트링이 다 찢어져서 그 부위가 보라색일 때도 있었었는데요. 그 때는 하루에 두 시간씩 세 번 정도 재활 치료를 하며 지냈어요. 이제는 부상이 오고, 힘든 상황이 되면 그냥 현실에 집중해서 그 상황에 최선을 다하려고 해요. 그러다 보면 부상도 빨리 이겨내게 되더라고요.
“저는 신발이 운동화 밖에 없어요. 디스크가 터진 이후로 하이힐은 거의 안 신죠. 그만큼 조심해야 하고, 관리를 해줘야 하는 게 디스크에요.”
허리디스크로 입원까지 할 정도면, 당시 굉장한 고통이었을 것 같아요. 디스크는 평소에도 관리를 잘해야 한다고 하던데 허리를 위해 따로 하는 운동이 있나요?
말씀하신 대로 디스크가 한 번 터지고 나면 그 이후로는 항상 관리하며 조심해야 해요. 계속 운동을 해줘야 하죠. 저는 하루에 두 시간 반 정도는 척추를 위해 운동을 하는 시간으로 보내는데요. 등 근육을 키우는 것도 좋지만, 복근 운동으로 코어를 강화시키는 게 허리에는 훨씬 좋아요. 허리 디스크에 좋은 운동을 추천하자면, 플랭크에요. 11초 버티고, 11초 쉬고. 이런 식으로 반복하는 게 심장이 계속 운동하는 효과를 줘서 좋다고 해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쿠션을 활용해 스트레칭을 하고요. 끝나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매트를 깔고 플랭크를 하는 게 일상이죠.
발레도 체형 교정에 효과가 좋다고 알려져 있는데, 정말 도움이 많이 되나요?
발레는 하늘로 날고 싶은 욕망에서 시작된 예술이에요. 그래서 토슈즈라는 것도 생겼죠. 중력이 느껴지지 않는 것 같은 상태가 되어야 날아다니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발레 무용수들은 중력을 뚫고 날아 오르는 사람처럼 보여야 하니까 모든 동작 자체가 풀업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계속 호흡을 상체 위주로 올려야 하고 척추를 편 상태로 텐션을 지켜야 하죠. 굽은 척추와 말린 어깨는 물론, 근육을 계속 움직여야 하므로 노화 방지에도 좋죠. 저처럼 너무 과도하게 하지만 않으면 정말 좋은 운동이긴 한 것 같아요(웃음).
운동을 많이 할수록 근육이 빨리 굳기 때문에 매일 아침저녁 30분 정도 반신욕을 꾸준히 한다는 김주원님.
평소 컨디션 관리는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요. 좋은 컨디션 유지를 위한 나만의 루틴이 있나요?
나이가 들수록 몸 관리를 더 예민하게 해야 하는 건 맞지만, 사실 저는 루틴을 갖고 있는 사람은 아니에요. 다만 허리디스크가 생기기 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해오고 있는 게 하나 있는데, 바로 반신욕이에요. 매일 30분 정도 아침저녁으로 반신욕을 하는 거죠. 운동량이 많고, 운동을 열심히 할수록 피로도가 쌓여서 근육이 빨리 굳거든요. 아침에는 근육을 말랑하게 풀어주기 위해, 밤에는 혈액 순환을 위해 반신욕을 하는 편이에요. 인위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따뜻한 물 안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정신적으로도 상당한 휴식이 되더라고요.
몸을 건강하게 관리한다는 게 쉬운 듯하면서도 많은 노력이 필요한 일인 듯 해요. 현대인들에게 해주고 싶은 건강에 대한 조언이 있다면요?
음, 저는 스스로 몸이 건강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몸을 열심히 단련하는 만큼, 과도하게 쓰거든요. 그래서 항상 부상도 많이 입고 수술도 하고요(웃음). 누군가에게 건강에 대한 조언이나 충고를 해줄 입장은 못 되지만, 무용수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생각해본다면, 뭐든지 과하면 좋지 않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적당히 먹고, 적당히 운동하고, 뭐든지 적당히. 몸에는 분명 적정선이라는 게 있거든요. 모든 것에 욕심내지 않고 적당할 수만 있다면 몸과 마음이 더 행복하고 건강해지지 않을까요?
”몸에는 적정선이라는 게 있어요. 욕심내지 않고 적당할 수 있다면 더 좋지 않을까요?”
a;keep 구독자에게 전해주고 싶은 김주원님의 한 마디는?
나이가 든다는 건 예전보다 몸의 회복 속도가 더디다는 걸 의미해요. 같은 몸이라도 회복이 되려면 이제 그만큼의 시간을 더 쏟아야 하더라고요. 그게 힘들지는 않아요. 그 정도로 운동을 해야 제가 사랑하는 무대에서 예전처럼 춤을 출 수 있으니까요. 저는 지금 40대 중반인데도 매일 꿈꾸고 도전하며 살고 있어요. 뭐든 경험하고 도전하면서 혼신을 다해 몰입하고 빠져보세요. 그래야 알 수 있거든요. 이것이 정말 모든 걸 쏟아부으며 도전할 가치가 있는 건지 말이에요. 마치 저에게 발레가 그런 것처럼요.
발레리나 김주원은,
올해로 데뷔 25주년을 맞이한 전 국립발레단 수석 무용수로, 현재 성신여자대학교에서 무용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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