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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시선] 꾸준함으로 쌓은 내공은 저항을 견디는 뿌리가 된다

기어다니지도 못했던 아기가 대입을 준비하는 고등학생이 될 만큼 18년이라는 세월의 무게는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무겁습니다. 임경선 작가님은 이 긴 시간 동안 글쓰기에 매진하며 24권의 소설과 에세이를 출간했는데요. 뿐만 아니라 3년 전부터는 사흘에 한 번은 반드시 달리는 4년 차 러너가 되기도 했죠. 무엇이 작가님을 이토록 꾸준하고 성실한 사람으로 만들었을까요?
"당신을 '킵고잉'하게 하는 건 무엇인가요?"
임경선 작가님은 통제할 수 없는 변수로 가득한 이 세상을 거창한 목표나 낙관이 아닌 작가님이 능동적으로 선택한 일상 루틴으로 맞서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삶 속에서 반드시 쓰고, 반드시 달리는 임경선 작가님의 에세이를 준비했습니다. 먼 미래를 꿈꾸는 대신 눈앞의 오늘을 단정하게 가꾸는 데 집중하는 사람, 임경선 작가님을 킵고잉하게 하는 원동력에 대해 들어봤어요.

임경선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로, 오랫동안 광고·인터넷·미디어 분야에서 마케팅 디렉터로 근무하다가 2005년부터 본격적으로 글 쓰는 삶을 살기 시작했다. 이후 성실하고 규칙적인 삶의 태도를 유지하며 18년 동안 24권의 책을 출간했다. 소설 <가만히 부르는 이름>, <호텔 이야기>, 에세이 <태도에 관하여>, <자유로울 것>등으로 독자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루틴의 의미

글/임경선(작가)

18년간 24권, ‘성실의 아이콘’이 된 비결

올해 전업작가 18년 차인 나는 이 긴 시간이 대체 언제 누적되었는지 전혀 감이 없었다. 신작 출간 인터뷰 때 ‘롱런의 비결’에 대한 질문을 단골메뉴처럼 받기 전까지는. 롱런? 제가요? 정신을 퍼뜩 차려보니 정말 그랬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지난 18년간 24권의 책을 써내고 나도 모르는 사이 출판계에서 ‘성실’의 아이콘이 되어 있었다. 롱런의 비결이나 더 나아가 늘 활발한 활동 중인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굳이 따지자면 꾸준히 쉬지 않고 책을 냈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장난 같지만 업계에서 잊혀지지 않으려면, 그 업계에서 계속 ‘보여야(visible)’했다. 그리고 글을 꾸준히 쓸 수 있었던 것은 내게 글쓰기가 오랜 꿈의 구현이나 자아실현 같은 거창한 그 무엇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루틴’이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작가가 되는 일은 어렸을 적 꿈을 이룬 것이겠지만 내게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따른 차선의 선택이었다. 12년간 기업에서 나름 안정적으로 커리어를 쌓아가던 나는 건강을 잃어 퇴사할 수밖에 없었고, 집에서 최소한의 체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다 보니 글쓰기에 안착한 것이다. 오랜 직장인 생활로 ‘출근’의 루틴이 몸에 새겨진 나는 조금씩 건강을 회복하면서 ‘회사에 출근하듯이’ 매일 아침 단골 카페로 나가 서너 시간 집중해서 글을 썼다. 육아와 병행하면서 하는 일이다 보니 시간을 조금도 허투루 쓸 수가 없었다. 뜸 들일 여유도 없이 자리에 앉자마자 원고작업에 들어갔고, 그러다 보니 일정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한 권의 책이 완성되기를 반복했다. 한때는 체력이 완전히 돌아오면 다시 회사로 복귀하려고 했지만, 글쓰기 루틴이 점점 몸에 배어 책은 계속 나오지, 덩달아 독자들이 늘어가지…하다 보니 빼도 박도 못하게 어느새 ‘롱런 작가’가 되어 있었다. 정말이지 마차 끄는 말처럼 눈 양옆을 가리고 바로 앞만 보고 꾸역꾸역 걸어간 죄 밖에 없다. 루틴이 이렇게 무섭다.

18년 차 롱런 작가, 4년 차 롱 러너가 되다.

“심신에 잘 배인 루틴은 우리의 중심을 단단하게 잡아주는 역할을 해주는 것 같다.”
2020년 봄, 코로나가 세상을 덮치면서 내게는 ‘달리기’라는 또 하나의 루틴이 생기게 되었다. 이 역시도 ‘글쓰기’와 마찬가지로 애초에 의도한 게 아니었다. 평소 하던 실내운동을 물리적으로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몸이 못 견디게 근질근질했던 어느 봄밤, 제대로 된 러닝화도 갖추지 않은 채 광화문 광장으로 뛰쳐나간 게 화근이었다. 밤 11시를 훌쩍 넘긴, 사람들이 거의 나다니지 않는 늦은 시간에, 나는 방금 감옥을 탈출한 죄수의 심경이 되어 마스크를 슬그머니 벗고 바깥공기를 흠뻑 들이키면서 달렸다. 하지만 전염병 시대의 답답함을 그렇게 잠시 해소했을 뿐, 코로나가 몇 달이면 끝날 거라고 순진하게 낙관하며 ‘시한부 운동’인 달리기를 편하게 즐겼다. 한데 몇 달은 커녕, 코로나는 그 후로 몇 년을 더 머물었고 더불어 나는 달리기를 멈출 수 없게 되어버렸다. 사흘에 한 번은 반드시 달리는 루틴이 만들어지며 러닝 기록은 점점 좋아지는 가운데 또 어느새 1,000킬로미터 넘게 달린 4년 차 러너가 되어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횡단보도 노란 불일 때도 못 뛰던 인간이! 사람 일은 이렇게 한 치 앞을 모른다.

불확실한 삶에서 유일하게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

하지만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비록 상황에 의해 다분히 충동적으로 시작한 글쓰기와 달리기라 해도, 그것들이 하나의 확고한 루틴으로 일상에 안착하게 된 것은 내가 그것들을 어느 시점부터 내 인생에 ‘제대로’ 들이기로 선택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나의 에세이 [태도에 관하여]에서 인생에서 가장 중시하는 다섯 가지 삶의 태도 중 ‘자발성’을 가장 먼저 꼽은 것은 놀랍지 않다. 나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내 삶을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감각이 소중했다. 루틴을 만들고 지키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내가 결정하고 수용하겠다는 자연스러운 다짐인 것이다. 한편, 이렇게 무엇인가를 삶에 능동적으로 들이기로 결정한 것은 내가 비관적 현실주의자인 것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내게 삶이란 기본적으로 우울하고 지루할 뿐 아니라 한 치 앞을 모르는, 언제라도 무너져 내릴 수 있는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것. 도리어 그렇기 때문에 그냥 놔 버릴 수는 없지 않을까? 그럴수록 제한된 상황에서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차분히 가늠하고 실천하는 일이 중요했다. 정말이지 살다 보면 불시에 찾아오는 불행이 있다. 스무 살 때부터 갑상선암 수술을 6번 받은 것도 모자라 나는 일 년 전에 폐암이 초기에 발견되어 오른쪽 폐의 절반을 절제했다. 입원하기 전날 밤 달리러 나갔던 장면이 주마등을 스친다. 어쩌면 이번이 생애 마지막 달리기가 될 수도 있겠다 생각하며 숨이 넘어갈 정도로 달리고 또 달렸다. 다행히 그것은 기우였다. 흉부외과 주치의는 폐를 최대한 팽창시키는 훈련을 해야 한다며 퇴원 후부터 가급적 빨리 달리기를 재개하라고 엄중히 지시를 내렸다. 수술 후 진통으로 정신 못 차리던 나는 빨리 걷기도 금세 숨차고 어질어질했지만 이내 몸에 새겨진 달리기 루틴이 스스로를 기억하고 깨웠다. 지난 3년간 꾸준히 달려온 덕분에 페이스는 조금씩 빨라졌고, 폐가 훼손되었음에도 폐활량이 정상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또한 하나의 루틴은 또 다른 루틴도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 달리기를 재개하면서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소설을 새로 쓰기 시작했다. 그 경험들을 거치면서 불행이나 고통이 불시에 찾아오는 건 내가 통제할 수 없지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 상황에서 무엇을 할지에 대해서는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럴 때 꾸준히 쌓아 나간 루틴이 있다면 대개의 고통은 견뎌낼 수 있었다.

급변하는 내년에도 루틴만은 나를 지켜줄 것이다.

“나의 방식대로 삶을 이끌어 가겠다는 의지, 그것이 적어도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비단 불행과 고통의 상황이 아니더라도 심신에 잘 배인 루틴은 우리의 중심을 단단하게 잡아주는 역할을 해주는 것 같다. 이제 벌써 또 한 해를 마무리할 시간. 연말연시는 한 해를 차분히 되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급변하는 내년의 환경’에 대비하기 위해 초조해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연말의 대형서점엔 이듬해 트렌드를 예측하는 다양한 책들이 베스트셀러 코너를 독점한다. 소싯적엔 ‘언택트 시대’에 적응해야 한다고 종용하더니 이제는 또 ‘AI 시대’에서 뒤처지지 않고 살아남아야 한다고 사람들을 겁주는 것만 같다. 그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나는 혼자 속으로 생각한다. 우리가 처한 환경은 앞으로도 수시로 계속 ‘급변’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매번 거기에 휘둘리고 맞출 수는 없다고. 급변하는 환경으로 인해 ‘선택지가 늘어났다’고 해석하자고. 자신에게 여전히 중요한 가치를 지키면서 선택적으로만 변화를 일부 적용하자고. 좋은 건 관심을 갖고, 아니다 싶은 건 아닌 거라고 판별하는 용기를 가지며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주변에서 의미 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릴까 봐 두려워하지 말자고. 분명, 내가 그 대상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한 그것은 엄연히 내 삶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자신의 중심을 잡아주는 루틴을 가진 사람들이 이럴 때 가장 휘둘리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은 외부의 급변하는 환경을 불안감이나 조바심이 아닌 냉철하고 다소 무심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들이다. 꾸준히 무언가를 반복하고 쌓아 나가는 일을 해오던 내공은 쉽게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있어야 마땅한 장소에 두 다리로 꿋꿋이 서 있기에 주변의 저항을 견디는 힘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의 흐름에서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절박하게 쫓아가기보다 조금 늦되더라도 시간의 힘을 믿어가며 자신에게 맞는 한 발자국을 신중하게 내딛는다. 지나고 보면 어렵지 않던 시절이, 어지럽지 않던 시절이 언제 있었던가. 때로는 주변의 소음을 차단하고 나에게 정말 중요한 일에 차분히 시간을 들이는 것, 그것이 가져올 결과를 믿으며 스스로를 부단히 단련시키는 것 – 다시 말해 나의 방식대로 삶을 이끌어 가겠다는 의지, 그것이 적어도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새해를 그런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에디터의 한 마디]

한 해의 끝자락에서 지난 일 년을 회상해 보면 우리를 둘러싼 많은 것이 달라졌다는 것을 실감하게 돼요. 단 하나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면 매일 꾸려나가는 일상이겠죠. 반복되는 일상이 마냥 단조로워 보일 수 있지만, 수많은 유혹을 뿌리치고 그 일상을 지켜내는 인간의 의지는 결코 단조롭지 않습니다. 자발적으로 형성한 글쓰기와 달리기 루틴의 힘으로 어지러운 세상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임경선 작가님의 글과 함께 다가올 미지의 내년도 여러분만의 루틴으로 의연하게 헤쳐 나갈 수 있기를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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